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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중하게 사과드립니다  -  2007/06/23 00:32
한소리 제3호에 실린 글, "한소리는 언론인가?"의 내용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정정하여, 이 글로 인하여 장규열 교수님과 한동신문이 부당하게 입으셨을 훼손된 명예와 심적 고통에 대하여 깊이 사과드립니다.
 
장규열 교수께서는 수업에서 한소리를 언론이 아닌 선동단체라고 주장한 바가 없습니다.
 
한 기자의 기사를 (한동신문의) 주간교수가 다른 기자를 시켜 일부 수정한 일이 없으며, 수정한 기자의 이름으로 내보낼 것을 요구한 바도 없습니다.
 
특히 이 부분에 관하여, 기자가 글에 인용된 기자들과 장규열 교수와 사실확인을 하지 않은 실수를 인정합니다. 조규성 학우(본인)는 이관희 교수와 전덕규 학우를 통해서 이 사실을 처음 접했습니다만, 한동신문사에서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 당연히 주간교수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본인의 추측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전적으로 조규성 학우의 책임입니다.
 
이에 따라 기사의 끝부분에 의견을 단 부분도 모두 정정합니다. 장규열 교수께서는 어떤 종류의 폭력도 행사한 바 없으며, 기자의 양심과 사상을 존중해 주지 못하는 행태를 자행한 적도 없습니다.  민주사회에서 용납되지 못할 행동을 한 바가 전혀 없으며, 군부독재 시절에나 나올 법한 행동을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한소리'가 그들 (한동신문)은 언론을 말할 자격이 있는지 되묻고 싶다고 언급한 부분도 도에 넘친 지나친 표현이었음을 인정하며 사과드립니다.
 
이 외에도 이 글은 조규성 학우의 의견이 자의적으로 포함된 기사임을 밝힙니다. 사실관계를 분명하고 적절하게 확인하지 않아 피해를 입으신 장규열 교수님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리고, 또한 한동신문사와 독자 여러분들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올려 드립니다.  한동신문과 한동신문의 주간교수께서 바른 언론을 위하여 수고하시는 헌신에 감사드립니다.



 ○  <제3호> 1면: "정정합니다."  -  2007/06/18 01:00
"정정합니다."

 지난 한소리 2호 2면에 실린 '교수임용, 학생에게 어떤 의미인가?'의 기사 내용 중,
 "비정규트랙 교수는 2년 계약직 전임교원으로 재임용을 1~2회로 제한하여 최대 6년이후에는 당연퇴직된다."라는 내용은 국내 비정규트랙 교수임용의 일반적인 경우를 의미하며, 우리학교의 경우 비정규트랙으로 임용되었더라도 최대 부교수까지 승진이 간으하며 단지 정교수로의 정년보장이 안될 뿐 재임용 횟수 및 기간에는 제한이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이에 해당 기사 내용을 정정합니다.



 ○  <제3호> 1면 : 한소리는 언론인가?  -  2007/06/18 00:50
한소리는 언론인가?
신문 혹은 언론의 객관화는 가능한가.

얼마 전 한동대학교는 교목실 목사 3명의 GLS 교수임용과 관련한 사안으로 인해 여러 논란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학교 당국의 결정에 반대하는 대자보 부착과 시위가 있었고, 이 과정에 한소리의 구성원들이 개입되면서, 과연 한소리가 언론인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이것은 외부에서 제기된 문제이지만, 한소리 내부적으로 제기된 문제이기도 했다.
이 논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우선 언론기관의 정의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네이버 국어사전에 따르면 언론기관이란 ‘세상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건이나 현상에 관한 뉴스와 정보를 취재하여 기사로 작성하고, 때로는 의견을 첨가하여 대중에게 제공하는 공적 기관, 신문사, 잡지사, 방송국, 통신사 따위가 있다.’이다. 일단 이 정의에 따르면 언론기관이 되는 데 큰 문제는 없어 보인다.

문제는 객관성?

한동신문 106호 오피니언에는 ‘언론과 선동’이라는 글이 실렸다. 그 글에 한소리가 직접 거론되지는 않았지만, 장규열 교수가 수업에서 한소리를 언론이 아닌 선동단체라고 주장했던 점으로 미뤄보아 한소리를 염두에 둔 것만은 분명하다. 장규열 교수는 이 글에서 신문윤리 실천강령을 근거로 보도의 균형감을 언론의 중요한 조건으로 주장했다. 물론 지극히 당연한 주장이다. 객관적인 사실을 근거로 가능한한 치우치지 않는 보도를 하는 것은 언론으로써 바람직한 자세일 것이다. 이런 면에서 지난 한소리 2호는 사실관계를 파악하는 데 다소 어려움을 겪었고, 그런 면은 언론으로서의 한계를 일부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소리가 언론이 아니라고 단언하기도 어렵다. 앞서 살펴본 언론기관의 정의에서도 ‘때로는 의견을 첨가하여’라는 대목이 삽입되어 있으며, 법률상으로도 ‘언론출판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필수적인 사상표현의 자유’라고 명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굳이 이런 것들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현실적으로 국내의 여러 신문이 각각 어떤 성향을 지니고 있는지는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것은 절대 객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소리는 사실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이것은 한소리의 태생적인 한계, 즉 일반 학생으로서 학교 당국을 취재하는 데 한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한소리가 애초부터 한쪽 취재원만 따라다닌 것은 아니었다. 이 사안의 관계자들에게 인터뷰 요청을 했고, 그 인터뷰가 거부되었다고 분명하게 기사에서 밝힌 바 있다. 물론 이 사실이 모든 것을 정당화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앞에서도 밝혔듯, 한소리가 지닌 일종의 한계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한계점은 시작할 때부터 인식했던 문제였다. 그럼에도 이 언론을 시작한 것은 창간호에서 밝혔듯이 ‘마지막 한 사람의 의견도 존중받고 그로 인해 여론을 형성할 수 있는 연단을 마련하는 것이 궁극적 목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학생들이 자유롭게 여론형성을 할 수 있는 장을 원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한소리에 글을 쓰는 필진이 한쪽 성향으로 기울어 있는 상황이긴 하지만, 한소리는 다른 목소리를 배제한 적이 없다.

객관은 가능한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이 세상에 객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자신이 갖고 있는 세계관의 틀로 모든 사안을 인식한다. 그렇다면 신문 혹은 언론의 객관은 가능한가? 앞에서 예를 들었듯, 우리나라에도 객관적인 언론은 사실상 없다고 생각한다. 같은 사안을 놓고도 해석이 다르기 때문이다. 해석은 기사나 사설 등을 통해 직접적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기사 선정이나 편집에서 이미 충분히 드러난다. 한동신문 역시 예외일 수는 없다.
장규열 교수는 ‘하나님의 눈’을 공정성의 기준으로 삼겠다고 했다. 나는 ‘하나님의 눈’이라는 말을 한 언론기관에서 사용한다는 점이 더 위험하게 여겨진다. 객관적 사실과 공정한 보도를 언론의 자격으로 내걸었던 기관이라 우습기까지 하다. ‘하나님의 눈’이란 누구도 그 실체를 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칫하면 ‘하나님의 뜻, 관점’이라는 명목으로 지도자가 하나님이 될 가능성도 커진다. 이번 학기 한동신문에서 있었던 기사편집 사건은 그러한 우려를 더 크게 한다. 한 기자의 기사를 주간교수가 다른 기자를 시켜 일부 수정한 뒤, 수정한 기자의 이름으로 내보낸 것은 이유를 불문하고 폭력이다. 기자의 양심과 사상을 존중해주지 않는 행태이기 때문이다. 민주사회에서 용납되지 못할, 군부독재 시절에나 나올 법한 행동이다. 과연 그들은 언론을 말할 자격이 있는지 되묻고 싶다.

조규성



 ○  <제3호> 2-3면 : Book Review - 예수의 섹슈얼리티  -  2007/06/18 00:30
예수의 섹슈얼리티

윌리엄 핍스 지음, 신은희 옮김, 이룸 펴냄.

Book Review - 이런 책도 있더라~!

예수의 섹슈얼리티
윌리엄 E. 핍스 the Sexuality of Jesus

"기독교인들이 예수가 결혼했다는 명제에 대해 불쾌감과 거부감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예수의 ‘성’에 대한 이슈는 언제나 전 세계적인 관심을 받게 된다. 댄 브라운은 <다빈치코드>에서 예수의 독신설에 이의를 제기하고 예수는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윌리엄 E. 핍스의 <예수의 섹슈얼리티> 또한 이와 같은 주장을 하고 있으나, <다빈치 코드>가 댄 브라운의 ‘신화적인 믿음’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는 점과 달리, <예수의 섹슈얼리티>는 역사적 관점에서의 예수, 여러 신학자들의 견해, 그리고 성서 해석과 같은 다양한 측면에서 예수가 왜 결혼했다고 보아야 하는지 <다빈치 코드>보다 더욱 설득력 있게 논증하고 있다.
<예수의 섹슈얼리티>의 저자인 윌리엄 E. 핍스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전제와 결론’ 방식을 통해 ‘예수의 결혼설’을 다루고 있다. ‘전제와 결론’방식은, 자신의 주장과 대립되는 주장의 전제를 기술하고 이에 대해 반론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19장 12절의 내용, “모태로부터 그렇게 태어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들어서 된 고자도 있으며, 또 하늘나라 때문에 스스로 고자가 된 사람도 있다.”라는 성경 구절을 가지고 예수가 독신이었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 주장의 전제에 대해 먼저 설명하고 다음에 이를 반박하는 성경해석을 통해서 “신약성서에서 예수는 고자가 되는 것을 장려하지 않았다”라는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예수의 결혼설에 대한 반론을 펼칠 때 이 주제에 대해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마도 ‘예수가 결혼했다는 이야기가 성경에 나와있지 않다. 그러므로 예수는 결혼하지 않았다’라는 주장일 것이다. 이 책에 따르면, 성경에 나와있지 않다고 해서 예수가 독신이었다고 섣불리 말할 수는 없다. 복음서에는 예수가 미소를 지었다거나 큰 소리로 웃었다는 기록 또한 없다. 그러나 그런 성서의 침묵이 예수가 평생 단 한 번도 기분 좋게 웃은 일이 없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또한 예수가 아팠다는 기록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모든 바이러스에 면역됐다고 볼 수 없다. 또한 그의 배설 기능도 마찬가지이다. 다른 역사적인 인물들의 생애와 마찬가지로 복음서에는 예수가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장면들만 있을 뿐, 예수의 배설에 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만약에 성서에 나와있지 않다고 해서 위와 같은 것들을 부정한다면 우리는 ‘완전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에 대한 의문을 품을 수 밖에 없다. 예수가 “실제로 인간이 아닌 ‘인간인 것처럼’ 보이게 한 것뿐이었다”라고 하는 ‘가현설(docetism)’로 빠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성서의 예수의 독신에 대한 침묵은 오히려 예수가 결혼했을 가능성이 더 많았음을 알려준다. 그것은 예수 당시의 팔레스타인 문화 속에서 드러난다. 예수는 유대인으로서 살았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주변 환경에 대해서는 그리 깊은 관심을 갖지 않는다. 혹자는 예수는 특별하기 때문에 유대의 전통에서 벗어났고 오히려 유대의 전통에 반대하였다고 주장하지만, 유대교 랍비였던 아키바는 예수의 정신적 기초는 유대교에 있다고 설명한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씀은 유대교 율법의 계명이었다.
예수가 살았던 유대 문화에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가르쳐야 하는 다섯 가지 의무 사항이 있었다. 요약하자면, 모든 유대인 아버지는 아들의 1)할례를 책임져야 하며, 2)아들을 하나님께 헌신하도록 하며, 3)율법을 가르치고, 4)기술을 가르치고, 5)결혼을 시켜야 했다. 유대인 남성의 경우 율법 해석가가 되고, 기술을 가지고, 성공적인 결혼 생활을 하면, 30세가 되어 비로소 권위 있는 인물로 인정받았다. 특히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을 한다면 반드시 결혼하여야만 했다. 누가복음에는 예수가 30세가 되면서 사역을 시작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예수 시대에 ‘랍비’라는 호칭은 유대 문화권에서는 최고의 선생을 일컫는 것인데, 복음서에는 예수를 랍비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열 두 번 이상 등장한다. 이는 예수가 랍비로서 존경 받을 만한 인물이었으며, 유대인으로서의 의무를 모두 실행했음을 말해 주고 있다.
따라서 예수의 결혼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은 오히려 ‘결혼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신학자 찰스 데이비스는 “예수가 유대 문화권에서 독신을 주장했다면 그것은 대단히 많은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을 것이다. 그리고 반드시 기록되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만약에 예수가 결혼하였다면 예수 같이 특별한 사람의 아내가 왜 언급되지 않았는가에 대한 질문을 해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세 가지다. 하나는 당시의 남성중심적인 문화에서 역사를 기록할 때에 여성들을 기록하는 경우는 주로 정상 문화에서 이탈하거나 악명 높은 여성들이었고, 평범한 아내와 어머니 혹은 여동생들을 기록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에 예수의 아내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은 독신일 가능성도 있지만 평범한 아내가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또 다른 한가지는 당시 문화에 있어서 결혼은 지금의 문화와 같이 개인적인 부분이 아닌 한 집안 대 집안의 약속이었다. 그래서 당시 문화에서는 아버지가 아들의 배우자를 아들과의 논의 없이 결정하였다. 마지막 다른 가능성은 성경의 편집은 예수 사망 후 한 세기 정도의 시간이 지나서 시작되었는데, 그 때의 기자들은 유대 문화와는 또 다른 성 문화의 인식을 갖고 있을 수도 있었기 때문에 설사 예수의 아내와 자녀에 대한 언급이 있었더라도 그 부분을 삭제하였을 수도 있었다는 가능성이다.
만약 예수가 독신이었고 독신의 삶이 기독교인들의 모델이라고 가르쳤다면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는 예수의 가르침과 모순된다. 바울은 결혼에 관한 가르침을 ‘주님의 명령’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바울의 독신에 관한 의견은 자신의 것이지 예수에게로 받은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는데, 그는 결혼한 사람들이 겪는 어려움들을 보면서 독신의 편리함을 언급하였을 뿐이었고, 독신 생활을 어떤 ‘경건함’과 엮으려고 하지 않았다.
많은 한동인들이 이 글을 읽는다면 먼저 거부감부터 들 것이다. 이러한 거부감은 ‘예수의 결혼’이라는 주장이 기독교의 정체성을 흔들어 놓는 어떤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주장하는 바로는, 신학적으로 전통 기독론과 역사 예수의 결혼설은 대립되지 않는다. 카톨릭 신학을 이끌었던 찰스 데이비스는 예수의 독신설을 면밀히 검토한 결과 ‘결혼’과 ‘신의 아들’이 병행할 수 없는 이유를 찾을 수 없다고 하였다. 성공회 사제들은 ‘예수가 모든 소년들이 경험하는 자위 행위를 한 번도 하지 않았다면 그것이 오히려 충격적일 것’이라고 말하였다. 5세기경 칼케돈 회의에서는 “우리와 같은 인간의 본성을 가졌다는 의미는 죄를 제외하고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았다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신약 성서의 히브리서는 예수의 인성을 확인해 준다. “그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십니다(히 4.15)” 이는 예수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유혹을 받았고 영적인 도전도 받았다는 증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이 책의 저자는 기독교인들이 예수가 결혼했다는 명제에 대해 불쾌감과 거부감을 느끼는 이유, 예수의 성에 대해 언급하기를 꺼리는 이유를 서양 정신사의 근본인 그리스 철학에서 찾고 있다. 그리스 철학자들은 거룩한 것과 세속적인 것을 구분하였다. 피타고라스, 플라톤은 모두 성적인 갈망을 금기시 여겼으며, 심지어 에피쿠로스 철학에서는 성욕을 ‘질병’으로 생각하였다. 초기 기독교 교회는 고대 유대 문화의 배경에서 성장하였지만 이방 문화와 접촉하면서 교회는 그리스 문화에 젖어 들게 되었고, 교회에서는 그리스 철학의 인간 이해를 수용하기 시작했다. 또한 인도 힌두교, 조로아스터 교, 마니교 등의 금욕 전통 또한 교회로 스며들게 된다. 결국 많은 그리스 로마 철학자들의 주장에 따라 성적 금기는 서양 역사 속에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서양 철학자들과 아시아 종교의 영향은 기독교의 형성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가장 권위 있는 성서 해석가였던 제롬과,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지대한 영향을 미친 어거스틴과 같은 사람 또한 이러한 사상의 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현대 철학의 거장들도 이를 받아들여, 칸트는 독신 생활이 더 깊은 지적 탐구를 가능하게 해준다고 하였으며, 쇼펜하우어는 독신이 기독교의 핵심이라고 표현하였다.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은 니체는 결혼이 자아실현의 장애물이 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서양의 전통이 고스란히 우리에게도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책의 막바지에서 예수가 독신이었을 수도 있고, 결혼하였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양쪽 모두 다 증거가 빈약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이 시사하는 바는 “예수는 결혼하였다!”라고 결론짓는 것이 아니다. 예수가 결혼하였다는 이론이 결코 기독교의 전통과 대립되지 않으며, 우리가 생각하는 예수의 독신은 성서해석적인 산물이 아닌 원래의 기독교 전통과 대립되었던 다른 ‘이방’ 전통의 산물이었다는 것을 밝힌 책인 것이다.
이 책은 예수의 독신설에 대한 약 13가지의 주장에 대해 반박하고 있는 데 비해 이 리뷰는 한 두 가지의 반박만을 담고 있기 때문에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특히 성경을 인용하여 예수의 결혼설을 반박하고 싶은 사람들이 많을 것이나, 이 책은 흔히 ‘예수가 독신이라는 주장을 뒷받침 해준다고 생각하는 성경구절’에 대한 성경해석들을 다루고 있으므로, 이 주제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이 책을 다 읽어 보기를 추천하는 바이다.

이진일(경영경제학부 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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